2026년 4월 부산 센텀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구입. 2025년 발간. 에세이
테세우스의 배
‘테세우스의 배’는 조금씩 변했지만, 법과 권위, 대중의 동의가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임을 인증해주었기에 계속 테세우스의 배로 남을 수 있었다. 인간은 평생에 걸쳐 테세우스의 배보다도 더 큰 변화를 겪는다. 이십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 역시 십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애써 믿으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애써 찾아내, 사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 p77
사람의 피부와 세포는 이 삼 주를 주기로 죽고 다시 만들어 지는데, 뇌세포는 예외라서, 사람이 가지고 태어난 뇌세포의 90%를 죽을 때 까지 사용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그가 가진 기억으로 그를 같은 존재라고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어찌보면 죽음이란 기억을 잃는 것이다.
스캔들이 된 고통의 의미
내가 기꺼이 견디고자 할 의미 있는 고통은 어떤 것일까? -p116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p137
“넌 작가가 될 거야. 틀림없어.” 이런 말은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그는 미래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더 열심히 글을 써 유명한 작가가 될까? 아니면 이미 작가가 다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대충대충 살다가 끝내 다른 일을 하게 될까? 알 수 없다. 미래를 보고 온 내가 현재의 사건에 영향을 주면 다른 미래가 그 지점에서 시작될 것이다. 미래를 보고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어느 쪽이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게 되면 나는 다른 사람의 한 번뿐인 인생을 좌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런 사람은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그들이 그때 그토록 궁금해하던 미래가 되었다. 그때 ‘가능성’ 판별을 부탁했던 학생들 중에 작가가 된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너의 가능성에 대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어. 나는 원래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아"라는 나의 말이 그들의 의지를 꺾은 걸까? 그들은 그 말을 ‘가능성 없음’의 완곡한 표현으로 받아들였던 걸까? 알 수 없다. 가르쳤던 학생들 중 몇몇은 작가가 되었는데 그중에 내게 가능성 같은 것을 물으러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묻지 않고 그냥 썼다. 그들은 자기 미래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쓰는 게 좋고 작가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계속 썼을 데고, 쓰다보니 작가도 되었을 것이다. 그들도 지금은 나처럼 “언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있을 것이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p142-143
좋아서 꾸준히 한다고 모두 원하는 미래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자질은 물론 운도 따라야 한다. 원하는 미래에 도달한 사람들만 놓고 보니까, 결과적으로 꾸준히 한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질이 없더라도, 여건이 따라 주지 않더라도, 좋아서 계속 하다 보면 언젠가는 운이 따라 줄 수 도 있고, 최악의 경우 운 조차 따라 주지 않더라고, 좋은 것을 하는 즐거움은 아직 남아 있다. 원하는 미래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빠져 그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두 원하는 미래에 ‘저절로’ 도달하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무용의 용
나의 이십대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로 시작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외우는 이들과 함께였다. 그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들이 부끄러워하던 시대는 가고 , 곧 1등이든 2등이든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라는 시대가 왔다. 지금은 너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오직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다는 ‘오징어 게임’, 서바이벌 게임의 세계관이 스크린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은밀히 믿고 있다. 액정화면 밖 진짜 세상은 다르다고. 거기에는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p152
우리가 김광석을 유재하를 그리고 기형도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나의 슬픔과 부끄러움 때문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